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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운동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한 번은 하고 싶었던 이야기

by 무벅 2023. 4. 5.

대회 후기만 쓰려고 했는데 이야기를 조금 풀다 보니 10년 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시작하게 됐다. 어쩌면 이런 글을 한 번은 쓰고 싶었던 것 같다. 언젠가 비슷한 내용의 글을 다시 한번 쓰게 될지 모르겠지만 한 번은 말하고 싶었던 나의 달리기 이야기다.

 

기억 속 마지막 대회

나는 마라톤 대회에 10년 만에 참여한다. 정확하게 <2013 나이키 위런 서울>에 참가한 뒤 딱 10년 만이다. 2011년부터 2013년까지 3년간 위런 서울에 모두 참가했었다. 당시에는 그런 행사에 참여하는 재미 자체를 느끼기 위해 참가한 거지 어떠한 기록을 목표로 한다거나 또는 대회를 위해서 훈련 같은 걸 하지는 않았다.

 

당시 나이키 위런 서울은 10K 달리기였는데 내 기억으로 나의 기록은 1시간 30분 정도였던 것 같다. 10K 달리기를 뛰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보통 체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기준에서 이 기록은 조금의 기록 욕심도 없는 오로지 즐거움 자체만을 목표로 한 기록이다.

 

어쨌든 나는 달리기에 별 다른 욕심도 없었고 그렇게 10년 전 2013년 나이키 위런 서울을 마지막으로 어떤 달리기도 마라톤도 하지 않았다. 아주 가끔 헬스장에서 다이어트 목적으로 트레드밀을 조금 뛰었던 기억만 있다. 물론 그것도 운동에 있어서만큼은 의지박약이었던 나에게는 별 다른 효과를 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달리기의 맛을 알다

본격적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한 건 2년 전인 2021년, 아이가 엄마 뱃속에서 나오기 두 달 여전쯤부터였다.

와이프 뱃속에 있는 아기의 성별이 남자임을 알게 되고 남자 아기를 키우게 될 나의 운명 앞에 가장 먼저 나의 뒤통수를 때린 건 형편없는 나의 저질 체력이었다. 운동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늘어져 있는 뱃살과 뽀얀 피부의 볼품없는 몸뚱이로 내가 과연 아들과 몸으로 놀아줄 수 있을까. 정신도 몸도 건강한 아이로 컸으면 좋겠는데 아빠로서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들이 머릿속에 가득했던 것 같다.

 

가장 우선시해야 하는 게 체력을 늘리는 것이었고 가장 가까운 방법으로 찾았던 게 달리기였다. 그렇게 2021년 5월 매일 5K 달리기가 시작 됐다. 별 다른 생각은 없었고 그냥 꾸준히 하자. 비가 오던 눈이 오던 그냥 하자. 아침이든 저녁이든 하루에 한 번은 무조건 더도 덜도 말고 5K만 달리자였다. 조금 무게를 실어서 얘기하자면 나 자신과의 약속이었고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3년째 달리고 있고 체력도 좋아졌고 이전보다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게 되면서 몸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이전에 비해 훨씬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

 

 

5K를 제외한 나머지는 사치다

매일 달리고 있으니 주변에서 다양한 제안을 해왔다.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느냐, 5K만 매일 달리기보다는 조금씩 거리를 늘려보는 건 어떠냐, 대회에 나가서 스스로의 기록을 늘려가는건 어떠느냐, 동호회에 나가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보는 건 어떠냐' 등 말이다. 그런데 말이다 당시에 나는 아주 어린 갓난아기를 육아 중이었다. 그런 활동들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육아를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아이를 키워본 적 없는 부부가 육아를 하기 시작하면 몸도 마음도 지치고 예민해져 작은 일에도 크게 실망하고 싸우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내 달리기를 위해서 바깥 활동을 늘리는 건 내 생각만 하는 욕심이었다. 그리고 이미 하루에 매일 5K씩 달리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건 분명 와이프의 배려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5K 달리기 외에 모든 활동은 지금 나에게는 다 사치다'라고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다

내 생각이 변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은 후부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 <해변의 카프카>로 내 기억 속에 있는 유명한 일본 작가다. 러닝과 관련 있는 책들 중에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가 있다는 걸 알았는데 계속 미루다가 몇 달 전 한 중고 서점에서 구입해 읽었다. 한 1~2주 읽었던 것 같은데 정말 내가 달리면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90% 정도 이상 글로 그대로 옮겨 준 듯한 느낌을 받았고 강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다. 내가 왜 달리기를 시작했는지, 달리다 보니 달리기가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는지, 앞으로 어떻게 얼마만큼 달릴 건지 와 같은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하루키는 꽤 오랜 세월 달리기를 해왔고 각종 대회에 참가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나의 생각이 변했다. 나도 한번 해보자. 나의 기록을 체크하고 관리해 보자. 매년 증가 또는 감소하는 신체적인 능력치를 가늠해 보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우연히 SNS를 통해서 동아마라톤 겸 서울 국제 마라톤이 열린다는 걸 알게 됐고 적당한 시기에 10K 마라톤 대회에 참가 신청을 했다.

 

대회 1주일 정도를 앞두고 참가 기념품이 집으로 도착했다. 공식 스폰서의 아디다스에서 러닝 티셔츠를 제작했다. 위런 서울 때도 나이키 셔츠를 받고 괜히 좋아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막상 대회 날이 되면 많은 러너들이 화려한 의상으로 입을 것이라고 예상 됐지만 나는 꼭 이 셔츠를 입겠다고 생각했다.

 

대회 당일

일요일 오전 9시 마라톤 대회의 출발점은 잠실의 올림픽공원이었다. 시간을 역으로 계산해 출발 시간을 따져보니 집에서 6시 이전에 나가야 하는 일정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와이프와 아이도 함께 하고 싶었다. 결승점에 가족이 있으면 배로 뿌듯할 것 같거니와 뭔가 예쁜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주변 도로 통제와 수많은 사람들이 몰릴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가족이 동행하는 건 여럿 피곤한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조용히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가방에 러닝화를 챙겨 넣고 집을 나서면서 괜한 비장함을 느꼈다.

 

"잘 달려서 첫 대회에 기록을 잘 남기자."  

 

기존 기록이 있는 사람들은 기록을 미리 제출해 A부터 H조까지 각 그룹에 배정됐다. 나는 기존 기록이 없어서 마지막 조인 H조에 배정되었다. 대회 현장에 가보니 정말 말할 수 없는 수많은 인파로 가득했다. 코로나로 4년간 대회가 열리지 못해 오랜만에 열리는 대회에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그중 H조에 특히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서 H조는 H-1조와 H-2조로 또 나뉘었다. 그때 누군가가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달리지도 못해 기록은 포기하자'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 순간 걱정이 앞섰다. 비장한 각오로 왔는데 자칫하면 그냥 애매하게 조깅을 하고 돌아갈 것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사회자가 출발을 알렸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있어서 출발점을 지나는데도 한참 걸렸다. 그리고 출발점을 통과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달릴 수 조차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 싶어서 사이드 제일 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리고 나니 뭔가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았고 본격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본격적인 레이스를 마쳤다. 기록은 45분 54초. 충분히 만족하는 기록을 얻었고 강한 뿌듯함을 느꼈다. 이 기록을 시작으로 조금씩 거리도 늘리고 페이스도 늘려서 적당한 시기에 42K 풀코스를 달리겠다고 마음먹었다.어쩌다 시작한 달리기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의미를 갖게 되었고 그 의미는 결코 단순하지 않게 되었다.

 

마치며

사실 달리기라는건 화려하지 않은 스포츠다. 누군가 그랬다. 달리기는 멈추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는 스포츠인 것 같다고. 맞다. 운동 종목마다 가지는 특징들이 있지만 달리기는 유난히 자신과의 싸움인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건 특정 목표가 있었을 때 생겨나고 그렇지 않았을 땐 보통 상쾌함과 기분좋은 느낌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꾸준히 달려보니 달리기는 어느정도 루틴만 형성되면 자연스럽게 건강을 찾을 수 있는 심플하지만 고효율적인 운동이다. 스스로 얼마나 더 꾸준하게 달리지 물어보면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냥 영원히라고 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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