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사연 많았던 나의 첫 번째 풀코스 사연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쓰다 보니 꽤 길어졌다.)
내가 풀코스 마라톤을 뛰다니 다시 생각해도 놀랍지 않을 수 없다.
어느덧 달리기 3년 차인데 가능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신기하다.
대회 같은거 말고 그냥 5K씩 매일 달리자로 시작했던 달리기였다.
어쩌다 보니 2023년 한 해 동안 10K, 하프, 풀코스 대회에 참가했다.
대회에 관심이 없었던 거 치고는 꽤나 열심히 달리지 않았나 싶다.
풀코스 이야기를 하기 전에 원래 하프코스는 뛸 계획이 없었다.
한 달 전 우연히 나가게 된 서울레이스 하프 마라톤에서 이슈가 있었다.
살살 뛰어야지 했던 게 당일 컨디션이 좋았고 중간 페이스가 잘 나오길래 10K 가까이를 오버페이스로 질주했다.
그리고 얻게 된 무릎과 발톱 부상. 그렇게 정작 풀코스 한 달여를 남겨둔 상태에서 장거리 연습을 전혀 하지 못했다.
미련했다.
지나고 나서 변경거리밖에 안 되겠지만
풀코스를 앞두고 내가 가지고 있었던 리스크는
1. 벌크업 한다고 웨이트 한 게 살크업이 되면서 늘어난 몸무게
2. 하프 마라톤 대회에서 얻은 양쪽 발톱 멍, 양쪽 무릎 외측근 부상
3. 올해 가장 길게 달려본 기록은 34K 3회 (정작 풀코스 거리를 달려본 적 없음)
4. 언덕길 훈련량 제로 (주로 달리는 도로는 최상으로 깔끔한 평지 코스)
이런 리스크를 가지고 풀코스에 도전한다고 하는 게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선수도 아니고 일반인이 그냥 일반인답게 달리면 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다.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도전 해야지. 체력을 요하는 마라톤인데 오늘이 가장 젊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번 달려보자. 기안84가 나혼산에서 보여준 느낌과 비슷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기안도 평소에 나름 열심히 달렸다고 하니 전우애 같은 게 느껴졌다.
나이도 한 살 차이고 몸매도 비슷한 거 같고.
그래서 나의 첫 번째 풀코스 마라톤 목표는!!
1. 5시간 내 완주!!
2. 감히 운이 따라준다면 서브 4!! (내심 서브 4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늘 마라톤 대회 전날 밤을 설친다.
역시 마라톤 대회 전날 밤 잠을 설치고 새벽 4시에 일어나 전날 저녁에 미리 사둔 맘스터치 싸이버거 하나 먹었다.
그리고 푹 잠들어있는 와이프와 아이가 깨지 않게 조심 좀 심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월드컵경기장역으로 향했다.
JTBC 마라톤은 역시 국내 최대 마라톤 행사답게 아침부터 사람들이 엄청났다. 정말 무서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도 오고!! 완전히 첫 번째 풀코스의 추억을 쌓기에 완벽한 조건이었다.
이른 6시 정도에 도착해서 오전 8시 출발할 때까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처음으로 에너지 젤도 하나 먹어봤고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러닝 커뮤니티가 없어서 이런 대회에 참가하면 주로 혼자 이어폰 끼고 있지만,
주변은 밝은 분위기로 대화도 나누고 서로 준비한 음식들을 나눠 먹으면서 행사를 즐기는 분위기가 가득이다.
나도 어디 단체에 가입해볼까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다가도 아니다 싶다.
드디어 8시가 됐고 출발 신호가 울렸다. 떨린다.
나는 가지고 있는 풀코스 기록이 없기 때문에 마지막 D그룹 중간쯤에서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작하자마자 바로 이슈가 생겼다.
출발점인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부터 합정 방향으로 가는 시작 지점이 주로 폭이 엄청 좁았다.
출발점이라 사람이 엄청 많았고 인구밀도가 높았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1K도 못 간 지점에서 살짝 패인 도로에 오른쪽 발을 접질렸다.
심한 통증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다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 시작하자마자 이런다고?? 42K를 달려야 하는데 시작부터??"
당장은 아픈지 잘 모르겠지만 레이스 후반부에 이 발목이 어떤 통증으로 찾아올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긴장하자. 일단 계속 가자. 오버페이스 하지 말자. 절대 오버페이스 하지 말자."
540~550 페이스를 유지했다.
괜찮다고 생각했던 게 심박수가 안정적이었고 그 페이스 그대로 하프 지점을 통과했다.
컨디션이 좋았고 몸이 가벼운 게 느껴졌다.
하지만 21K 하프 구간을 넘어가면서부터 변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 풀코스 마라톤은 레이스가 긴 만큼 돌발 상황이 크게 작용할 것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나름대로 이런 변수에 대비한다고 했지만 풀코스 런린이가 뭘 알았을까.
먼저 23K 부근에서 왼쪽 무릎에 감아놓은 테이핑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테이핑이 떨어지는 건 어쩌면 흔한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나는 사실 양쪽 무릎 외측근 부상이 있었기 때문에 무릎 테이핑이 떨어지면 절대 안 되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무릎이 아픈 것보다 심리적인 요인이 더 컸던 것 같다.
그래서 더욱 칭칭 감아 놓았지만 결국 테이핑은 야속하게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25K 부근 오르막길이 나오기 시작했다.
준비해 둔 에너지젤을 하나 뜯어먹었다.
이 오르막길을 함께 뛰어오를 비트가 강한 BGM을 골라 재생했다.
"자! 가보자!!"
하는 순간, 바로 이어폰 전원이 나가버렸다. 헛.
평상시에 달리기를 할 때 항상 에어팟 프로를 착용했다.
하지만 오래돼서 배터리 지속시간이 2시간 밖에 되지를 않았다.
그래서 이번 풀코스 마라톤을 앞두고 장만한 새 이어폰이었다. 샥즈..
무려 8시간의 배터리 지속시간이라고 읽었었는데 내가 충전을 잘 못 한 건가 싶었다.
레이스 반 밖에 안 왔는데 이어폰 배터리가 방전됐다고??
이때 멘탈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아직 음악으로 달리는 런린이란 말이다.
그리곤 음악 없는 고독한 오르막길이 시작됐다.
달리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어폰을 껐다 켰다를 5번은 했다.
결국 이어폰은 포기했다.
그리고 길거리의 응원해 주는 분들의 소리에 집중했다.
이어폰 소리를 멈추고 처음 알았다. 거리에서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 배번표의 이름을 보고 또 부르면서 응원해 주시는 걸!!
달리면서 참 많은 분들께 엄청난 파이팅을 받았던 거 같다.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화이팅을 외쳐주셨다.
비 내리는 날 주로에서 그런 화이팅을 들으니 정말 감동이었다.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평지에서 오른쪽 발목을 다시 한번 접질렸다.
원래 발목을 잘 접질리지 않는데 이상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살짝 접질려서 크게 걱정은 안 됐지만 평소에 연습하는 깨끗한 주로와
실제 도로는 확실히 차이가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33K 부근에서 이번에는 왼쪽 운동화끈이 풀렸다.
아무래도 장거리 레이스이다 보니 혹시 몰라 리본을 묶기 전에 두 번을 돌려 감아뒀었다.
리본끈이 풀려도 신발 끈이 아예 풀려서 헐거워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실수를 했다.
운동화 끈을 바로 다시 묶었어야 했던 것 같다.
간신히 서브 4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던 상태라 약간의 페이스도 늦추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신발끈이 풀려 있는 채로 끝까지 달렸다.
골인지점까지 사고는 없었지만 끈을 밟기라도 했다면 어쩌려고 그랬을까.
다음에는 그러지 말자.
37K 정도까지 5분 50초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선방하고 있었고 체력이 떨어진다거나 힘들어서 못 뛰겠다거나 하는 느낌이 없었다.
5K만 더 가면 된다.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하나 남은 에너지젤을 먹었다.
"마지막 4K만 스퍼트를 내서 조금이라도 서브 4에 가까워지자"
38K에서 슬슬 달려볼까 하는 순간 무릎에서 뭔가 뚝!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프 때 다쳤던 양쪽 무릎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잘못됐다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달려온 게 한 순간 다 끝나는 거 같은 느낌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퍼질 수 없다.
아니, 퍼진다는 건 뭔가 체력이 바닥나서 걷는다는 느낌인 것 같은데
나는 아직 확실히 체력이 남아있다.
달릴 수 있다. 끝까지 달리자.
마지막까지 절대 걷지 말자."
꾸역꾸역.
걷는 것도 아니고 뛰는 것도 아니다.
달리는 폼만 하고는 걷는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왠지 무릎이 제발 멈춰 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점점 통증이 심해진다.
조금 더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다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무릎 부상 때문인 걸까?
레이스 막바지에 무릎이 잠긴다는 게 이런 느낌인 건가?
모르겠지만 너무 아프다.
어제저녁 먹으면서 와이프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오빠는 가장이야. 절대로 다치면 안 돼! 힘들다 싶으면 바로 포기해야 돼! 명심해!"
맞다. 나는 가장이다.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끝까지 달리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는데 그 순간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레이스를 멈췄다.
38K 조금 지난 지점이었다.
훈련 때도 제일 길게 달려본 게 34K다.
그 이상은 달려본 적이 없었는데 역시 이런 결과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아쉬웠지만 받아들여졌다.
훈련도 부족했고 무릎도 정상이 아니었다.
몸무게도 많이 나갔다.
전체적으로 준비가 부족했다.
그래 이 몸뚱이로 38K 온 거 고생했다.
그렇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나머지 4K는 남은 에너지로 최대한 빠르게 걷자.
나를 추월해서 달리는 다른 주자들이 부러웠지만 달릴 수 없었다.
그렇게 걷다가 뛰다가 걷다가 뛰다가 하면서 페이스는 6분 10~20초대로 내려갔다.
그리고 피니쉬 라인이 가까워질 때쯤 거리에서 응원해 주던 한 남자분.
"(내 배번표의 이름을 보고) XX 형!! 한번 더 뛰자!!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달려보자 형!!! 할 수 있어!!!"
와.. 정말 잊지 못한다.
어떻게 난생처음 보는 사람한테 저렇게 소리쳐 줄 수 있을까.
너무 힘들었는데 눈물 날 뻔했다. 너무 고마웠다. 그 이름 모르는 동생ㅠㅠ
그분 덕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서 한번 더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 800미터.
그리고 하나 둘 하나 둘 마음으로 구호를 넣으면서 피니쉬라인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아빠!!!!"
뜨헛!! 와이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와이프가 아이를 안고는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는 너무 힘들어서 몰랐는데 지금 글을 쓰다 보니 눈물이 핑 돈다.
"와! 대단한데?? 나는 오빠 포기할 줄 알았는데 5시간 안에 들어왔네?!! 정말 잘했어!!"
나의 42.195K
첫 번째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4시간 38분 동안 정말 별별 생각과 해프닝, 감동이 있었다.
너무 벅차고 뿌듯한 감정이 올라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세 살배기 아들도 뭐가 그리 좋은지 엄청 신나 있었고 흥분해 있었다.
기록이고 뭐고 서울을 횡단한 나 자신 스스로가 기특하게 느껴졌다.
할 수는 있을 것 같았는데 진짜로 해내다니, 이런 미친 자식!!
그리고 또 메달은 왜 이렇게 예쁜 건데!!
10K, 하프 메달하고 차원이 달라. 42.195라는 숫자도 멋있어 보여.
그렇게 나는 약간 미친놈처럼 풀코스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내년 3월 서울동아마라톤을 이미 10K로 신청을 해버려서 자연스럽게 나의 서브 4 도전은 2024 춘천마라톤 풀코스로 정해졌다.
매년 상반기, 하반기 1년에 두 번 마라톤 대회를 나가 볼 생각이다.
기록에 집착하기보다는 꾸준한 운동을 건강한 의식으로 만드는 삶을 살고 싶다.
다른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달리기 같은 걸 따로 권해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번 풀코스를 달려보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해 주고 싶다.
어떻게 보면 남의 이야기 같겠지만 천천히 준비해서 꼭 한 번 이 기분을 느껴봤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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